2026. 5. 4. 14:31ㆍ카테고리 없음

와인 한 병을 다 마시고 나면 병 바닥에, 혹은 디캔터 안쪽에 짙은 자줏빛 찌꺼기가 남는다. 나도 한동안은 그냥 헹궈 버렸다. 딱히 쓸 데가 없어 보였고, 위생적으로도 찝찝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프랑스 보르도 와이너리 투어 영상을 보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직원들이 그 '찌꺼기'를 소중하게 따로 모아 다른 용도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궁금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와인 찌꺼기, 사실은 영양 덩어리다
와인 찌꺼기는 크게 두 가지다. 발효 과정에서 생기는 효모 잔여물인 '리스(lees)'와, 병이나 코르크 주변에 결정처럼 맺히는 '타르타르산 결정체'다. 후자는 '와인 다이아몬드'라고도 불린다.
와인 찌꺼기의 주요 성분
-타르타르산 (Tartaric acid) — 천연 유기산, 식품·의약에도 쓰임
-폴리페놀 & 안토시아닌 — 강력한 항산화 작용
-레스베라트롤 — 피부 재생, 항염 효과로 주목받는 성분
-효모 잔여물 — 미네랄, 아미노산 풍부
이 성분들을 보면 단순한 쓰레기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폴리페놀의 경우 일반 비타민 C보다 수십 배 강한 항산화 효과를 낸다고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이를 추출해 화장품 원료로 활용하는 브랜드도 늘고 있다. 유럽 와이너리들이 찌꺼기를 따로 모으는 이유가 있었다.
피부에도, 식물에도, 요리에도 쓴다
가장 친근하게 시작할 수 있는 건 스킨케어다. 레드와인 찌꺼기를 설탕이나 올리브오일과 섞으면 천연 각질 제거 스크럽이 된다. 프랑스 보르도, 스페인 리오하 같은 와인 산지에서는 이미 '비노세러피(Vinotherapy)'라는 이름으로 와인 찌꺼기를 활용한 스파 트리트먼트가 고급 웰니스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피부 자극이 있을 수 있으니 소량으로 패치 테스트를 먼저 해보는 게 좋다.
텃밭이나 화분이 있다면 더 반가운 용도가 있다. 와인 찌꺼기를 물에 10배 이상 희석해 식물 주변에 뿌리면 천연 비료 역할을 한다. 산성 토양을 좋아하는 블루베리, 장미, 수국에 특히 잘 맞는다. 요리에도 응용할 수 있다. 알코올을 충분히 날린 찌꺼기를 소스나 리소토에 조금 더하면 깊고 복합적인 풍미가 생긴다.
✨ 피부 스크럽 설탕+올리브오일 혼합, 각질 제거 및 혈색 개선
🌿 천연 비료 10배 이상 희석 후 산성 토양 식물에 활용
🍳 요리 풍미 추가 알코올 날린 후 소스·리소토에 소량 사용
🎨 천연 염색 면 소재에 은은한 빈티지 컬러 연출 가능

집에서 바로 실천하는 보관 & 활용 팁
막상 해보려면 "그럼 어떻게 모아두지?" 하는 생각이 든다. 간단하다. 와인을 다 마신 날, 찌꺼기를 아이스큐브 트레이에 넣어 얼려두면 된다. 요리할 때, 스크럽 만들 때 하나씩 꺼내 쓸 수 있어 편하다.
1. 냉동 보관: 아이스큐브 트레이에 얼려 소분하면 필요할 때 하나씩 꺼내 쓰기 편하다.
2. 족욕 활용: 따뜻한 물에 레드와인 찌꺼기를 풀면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 욕조 착색에 주의할 것.
3. 천 염색 실험: 흰 면 손수건에 찌꺼기 물을 들이고 소금이나 식초로 매염 처리하면 은은한 빈티지 컬러가 난다.
4. 글로벌 트렌드 참고: 이탈리아 브랜드 'Vegea'는 와인 부산물로 비건 가죽까지 만든다. 지속가능성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와인 한 잔의 즐거움이 마시는 순간에서 끝나지 않아도 된다. 병 바닥에 남은 그 작은 찌꺼기가 피부를 가꾸고, 식물을 살리고, 요리의 깊이를 더할 수 있다면 — 이제 그냥 흘려버리기가 좀 아깝지 않은가.
버리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보자. 와인의 두 번째 삶이, 어쩌면 첫 번째 삶만큼이나 풍요로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