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2. 13:53ㆍ카테고리 없음
소주 한 잔이 더 자연스러운 땅에서, 오크향 나는 병 하나를 팔아보겠다고 마음먹은 날의 기록
처음 와인을 팔겠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은 딱 두 가지였다. "대단하다"거나, "왜?"였다. 한국에서 와인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어딘가 낯설고, 비싸고, 까다롭다는 인식을 달고 다닌다. 그 편견 속에서 한 병씩 팔아가며 배운 것들을 여기에 솔직하게 적어보려 한다.
"와인은 나랑 안 맞아요"라는 말 뒤에 숨겨진 것
와인을 팔기 시작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이것이었다. 처음엔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막걸리 애호가인 지인이 내가 권한 화이트 와인 한 잔을 다 비우더니 "이거 생각보다 맛있네"라고 했다. 그때 깨달았다. 사람들이 와인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와인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라고.
한국은 오랫동안 소주와 맥주가 식문화의 중심이었다. 와인은 레스토랑 메뉴판에서도, 집 냉장고에서도 늘 비주류였다. 그 익숙하지 않음이 거리감이 됐고, 거리감이 "나랑 안 맞아요"라는 말이 된 것이다. 팔기 어려운 게 아니라, 만나게 해 주면 됐다.
가격표가 아니라 이야기를 팔아야 했다
처음엔 원산지, 품종, 숙성 방식을 줄줄 설명했다. 그런데 고객의 눈빛은 점점 흐릿해졌다. 전문용어가 많을수록 와인은 더 멀어졌다. 전환점은 어느 중년 부부에게 와인을 설명하다가 우연히 꺼낸 한마디였다.
"이 와인은요, 이탈리아 남부 할머니가 손녀 결혼식 때 내놓던 그런 맛이에요. 쨍하고 시원하면서 잔잔하게 따뜻한."
부부가 웃으면서 "그거 주세요"라고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와인을 스펙이 아니라 장면으로 팔기 시작했다. 여름 저녁, 치킨, 퇴근 후 첫 한 모금, 오랜 친구와의 밥자리—이런 말들이 어떤 포도 품종 설명보다 더 잘 팔렸다.
현장에서 배운 것
사람들은 와인의 스펙을 사지 않는다. 그 와인이 만들어줄 순간을 산다. 이야기가 없는 제품은 선반에서 먼지를 먹는다.
"비싼 거 아니에요?"라는 질문과 맞닥뜨리는 법
와인에 대한 두 번째 장벽은 가격이었다. 정확히는, 가격에 대한 오해였다. 많은 사람들이 와인 하면 10만 원짜리 병을 떠올린다. 유명 레스토랑이나 특별한 날의 기념품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현실은 달랐다. 편의점 맥주보다 조금 더 내면 충분히 맛있는 와인을 살 수 있다. 그걸 보여주는 게 내 일이 됐다. 1만 원대 스페인산 와인, 2만 원대 칠레산 와인 한 병을 손에 들고 "이거, 삼겹살이랑 진짜 잘 어울려요"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와인은 비싼 문화가 아니다. 다만 그렇게 포장 돼온 역사가 있을 뿐이다. 그 포장을 조금씩 벗겨내는 것, 그게 이 일의 핵심이었다.
와인이 퍼지는 방식은 소주와 다르다
소주는 회식 테이블에서 퍼진다. 누군가 시키면 다 같이 마신다. 하지만 와인은 다르다. 와인은 한 사람에서 시작된다. 먼저 마셔본 한 사람이 "이거 진짜 맛있더라"라고 말하면, 그 말을 들은 누군가가 사본다.
그래서 처음엔 한 명에게 집중했다. 한 명을 진짜 팬으로 만들면, 그 사람이 열 명을 데려온다. 와인 한 병을 팔기 위해 한 사람과 1시간을 이야기한 날도 있었다. 그 사람은 한 달 뒤 친구 두 명을 데리고 왔다.
이 방식은 느리다. 하지만 견고했다. 브랜드가 아니라 신뢰가 쌓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와인을 마시지 않는 나라에서 와인을 판다는 것
한국은 지금 변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 혼술 문화가 자리 잡고, 홈파티가 늘었다. 편의점 와인 코너는 5년 전보다 세 배는 커졌다. 20대들이 유튜브에서 와인 리뷰를 보고 자연스럽게 병을 고른다.
"와인을 마시지 않는 나라"라고 생각했던 곳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그 변화 속 어딘가에 내가 팔아온 병들, 내가 나눈 이야기들이 있을 거라 믿는다.
와인을 파는 일은 생각보다 와인과 무관한 일들로 채워진다. 사람을 읽는 일, 타이밍을 잡는 일, 거절을 견디는 일, 그리고 가끔씩 "이거 진짜 맛있다"는 말을 듣는 작은 기쁨.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오늘도 한 병씩 팔리고 있다.
"와인은 마시는 게 아니라, 나누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와인 한 잔을 건네던 날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