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케 입문 가이드(정미보합, 특정명칭주, 전통주)

2026. 5. 6. 17:59카테고리 없음

여러가지 사케 이미지

청주는 다 비슷한 맛 아닌가요?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복주처럼 심심하고 밋밋한 술이겠거니 했는데, 닷사이 23을 처음 입에 댄 순간 그 생각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사케가 이렇게 다양한 세계를 품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 세계를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실감했습니다.

정미보합과 특정명칭주, 숫자 뒤에 숨겨진 이야기

사케 라벨에 적힌 숫자가 알코올 도수라고 알고 계신 분들이 꽤 많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닷사이 23, 닷사이 39에서 23과 39는 도수가 아니라 정미보합(精米步合)입니다. 여기서 정미보합이란 쌀을 깎아내고 남은 비율을 뜻합니다. 닷사이 23은 쌀의 77%를 도정하고 겨우 23%만 술의 원료로 사용했다는 의미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쌀을 깎아내냐고 물으시면, 쌀의 단백질과 지방이 대부분 겉면에 몰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분들이 술로 발효될 때 쓴맛이나 잡내를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일본은 쌀 겉면을 최대한 제거하고 안쪽의 전분질만 활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정미보합이 낮을수록 원료 손실이 크고 원가가 오르니, 당연히 가격도 올라가게 됩니다.

이 정미보합과 원재료 구성에 따라 사케는 크게 특정명칭주(特定名稱酒)로 분류됩니다. 특정명칭주란 보통주보다 엄격한 기준을 충족한 고급 사케 군을 말하며, 코오지(누룩곰팡이) 사용 비율이 전체 원료 중 15% 이상이어야 하고 일정 등급 이상의 쌀만 사용해야 합니다.

특정명칭주 안에서도 분류가 세분화됩니다.

  • 준마이슈(純米酒): 100% 쌀만으로 만든 사케. 정미보합 제한 없음
  • 긴죠슈(吟醸酒): 정미보합 60% 이하로 긴조 제법 적용. 주정 첨가 가능
  • 다이긴조슈(大吟醸酒): 정미보합 50% 이하. 100% 쌀이면 준마이 다이긴조슈
  • 혼조조슈(本醸造酒): 정미보합 70% 이하에 일정 비율의 주정(알코올) 첨가

여기서 긴조 제법이란 저온에서 천천히 발효시켜 과실향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 제법으로 만든 사케에서 파인애플, 멜론 같은 향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직접 같은 브랜드의 사케를 종류별로 사서 비교해 본 적이 있는데, 정미보합 10% 차이만으로도 맛이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쌀을 조금 더 깎은 쪽이 살짝 더 가볍고 입안에서 금방 사라지는 듯한 질감이었습니다. 표현하기 어렵지만 "하늘하늘하다"는 느낌이 딱 맞았습니다. 이게 실제로 체감이 된다는 게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이런 흐름이 수치로 확인됩니다. 한국은 현재 일본 사케 수입량 기준 세계 3위 국가이며, 최근 3년 연속 수입액과 수입량이 모두 증가하고 있습니다(출처: 일본 국세청 주류 통계).

경험으로 배운 것들, 그리고 우리 전통주에 대한 아쉬움

닷사이 23을 처음 마신 날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와인처럼 부드럽고 향이 있는 술이 청주라니, 그동안 제가 알던 청주의 개념이 완전히 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조카가 새 사위를 데려왔을 때 닷사이 39를 함께 마셨는데, 23만큼의 기대를 조금 낮추고 마셨는데도 충분히 부드럽고 맛있어서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정미보합이 높아질수록 맛이 단조로울 거라는 생각도, 실제로 마셔보니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꼭 다이긴조가 더 맛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혼조조슈처럼 주정이 살짝 들어간 사케가 오히려 음식과 페어링 하기에 더 편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과실향이 쨍하게 올라오고 끝맛에 알코올이 살짝 치고 올라와서 어떤 음식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느낌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입문자보다 오히려 술을 어느 정도 마셔본 분들이 더 공감하시는 부분입니다.

입문자 분들께 제가 실제로 마셔보고 권하는 사케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닷사이 39(준마이 다이긴죠슈): 부드럽고 향이 직관적이며 입문자에게 가장 무난한 선택
  • 자쿠 미야비노토모(준마이 긴죠슈): 파인애플 향과 은근한 단맛이 편안합니다
  • 핫카이산 토쿠베츠 혼조조슈: 음식 페어링에 강하고, 알코올감이 적당해서 질리지 않습니다
  • 북극곰의 눈물: 닷사이가 가격 부담이라면 이 제품이 가성비 면에서 충분히 좋습니다. 흰 살 생선회와 특히 잘 어울립니다

사케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 가지 자꾸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일본이 이렇게 사케를 국가적으로 보호하고 육성하는 동안, 우리 전통주는 비슷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케 페스티벌이 도쿄 롯폰기 힐스에서 매년 열리는 모습을 보면서 솔직히 부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가정 주류 제조를 금지하고 면허제를 도입한 흔적이 지금도 우리 전통주 문화에 남아 있다는 것도, 공부하면서 처음 알게 된 불편한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약주(藥酒)는 전통 방식의 누룩을 사용한 맑은술을 말하고, 일본식 코오지 방식으로 만든 맑은술은 청주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이 구분 자체가 일제강점기에 조선 청주를 억지로 약주라 부르게 만든 데서 비롯됩니다. 광복 이후 80년 가까이 지났어도 이게 아직도 바뀌지 않았습니다(출처: 국세청 주류 면허 및 법령 안내).

일본의 장인 정신과 전략적인 산업 육성은 분명 배울 점이 있습니다. 다만 그 이면에 있는 역사를 잊지 않으면서 우리 술을 더 아끼고 알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사케가 처음이라면 닷사이 39나 자쿠 미야비노토모 한 병으로 시작해 보시길 권합니다. 흰 살 생선회 한 접시와 함께라면 더욱 좋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우리 전통 약주도 한 번 나란히 비교해 보시면, 두 술이 생각보다 가까이 닿아 있다는 걸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bsNT4xbuv3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