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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부가 30년 키운 와인가게를 제가 이어받았습니다

momswi 2026. 4. 6. 00:14

가게 문을 처음 열던 날, 저는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진열대에 놓인 와인 병들, 30년 된 나무 선반의 냄새.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데 뭔가 달랐습니다.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형부는 30년 전 이 가게를 시작했습니다. 지방 도시에서, 와인이 생소한 사람이 대부분이던 시절에. 그래도 초반엔 제법 잘 됐습니다. 지역에 와인을 제대로 파는 곳이 없었으니까요. 형부 가게가 이 도시 와인의 전부였던 시절이었습니다. 결혼기념일 선물을 사러 오는 남편들, 회사 접대용 와인을 고르러 오는 직장인들, 처음 와인을 마셔보고 싶다는 젊은 손님들. 형부는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게를 키워갔습니다. 그러다 대형마트가 생겼습니다.

 

동네에 대형마트가 생기던 날을 형부도 저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주차장이 넓고, 가격이 싸고, 장 보면서 와인까지 한 번에 살 수 있는 곳. 손님들이 하나둘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매출이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주변에서 걱정하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이제 와인 가게는 힘들지 않겠어?" 형부도 많이 힘드셨다고 했습니다. 가격으로는 절대 마트를 이길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때 형부가 내린 결론이 하나 있었습니다. 가격으로 싸우지 말자. 대신 마트가 절대 줄 수 없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손님의 얼굴을 기억하고, 지난번에 산 와인이 어땠는지 물어보고, 오늘 어떤 자리에서 마실 건지 듣고 나서 딱 맞는 한 병을 골라드리는 것. 그러자 신기한 일이 생겼습니다. 마트에서 와인을 사 마셔본 손님들이 오히려 형부 가게를 더 찾기 시작했습니다. "마트에서 샀는데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요. 골라주세요." 마트가 와인 입문자를 만들어줬고, 그 입문자들이 형부 가게의 단골이 됐습니다. 위기가 오히려 가게의 색깔을 만들어준 셈이었습니다.

 

그렇게 버티고 버텨 30년이 쌓였습니다. IMF도 넘기고, 대형마트도 넘기고, 코로나도 넘겼습니다. 그런데 형부 건강이 나빠지시면서 가게를 더 이상 혼자 꾸려가기 어려워지셨습니다. 그때 제게 가게를 넘겨주셨습니다.

제가 이어받기로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망설였습니다. 와인을 모르는 건 아니었습니다. 취미로 마셔본 적도 있고, 어느 정도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취미로 마시는 것과 팔아서 먹고사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요. 무엇보다 무서웠던 건 따로 있었습니다. "형부가 30년 동안 쌓아온 신뢰를 내가 무너뜨리면 어떡하지." 단골손님들은 형부를 믿고 오는 분들입니다. 형부의 눈을 믿고, 형부의 추천을 믿고. 그 자리에 제가 서야 한다는 게 가장 큰 부담이었습니다. 그래도 결국 이어받기로 했습니다. 형부가 30년 지켜온 가게를 그냥 문 닫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가게를 넘겨받고 나서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형부가 30년 동안 쌓아온 것들 — 단골손님들의 얼굴, 취향, 기억들 — 은 형부의 머릿속에 있었습니다. 노트도, 기록도 없었습니다. 그냥 30년이 형부 안에 있었던 겁니다. 그게 처음엔 막막했습니다. 단골손님이 오실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혹시라도 실망시켜드릴까 봐. 그런데 손님들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형부 분이세요? 오래 하셨어요." 그런 말들로 서로의 감정을 나누기 시작했고 저의 단골손님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가게를 이어받은 지금 매출이 예전만 못합니다. 제가 부족해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경기가 전반적으로 어렵고, 소비 자체가 줄었습니다. 와인 시장도 예외가 아닙니다. 주변 자영업자들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시대가 바뀌는 시기를 하필 가게를 막 이어받은 시점에 맞닥뜨린 셈입니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 없습니다.

오늘도 문을 여는 이유

우리 와인가게 이미지

대형마트가 들어서고, 편의점과  온라인으로 와인을 살 수 있고, 이제는 AI 시대를 맞아 모든 게 변해가고 있는 지금이지만 저도 버텨보려 합니다. 30년도 자신할 수 없고, 와인을 집에서 쉽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점점 더 많아지겠죠. 하지만 결국, 사람은 사람에게 오지 않을까요? 가격으로 싸우지 않고, 손님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듣는 것. 오늘 어떤 날인지, 누구와 마실 건지, 예산은 얼마인지. 그 이야기에 맞는 와인 한 병을 진심으로 고르는 것. 마트도, 새벽배송도, 알고리즘 추천도 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겁니다. 사람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저도 해볼 생각입니다. 아직 제30년은 시작도 안 했으니까요.

오늘도 가게 문을 엽니다.